여행후기/국내여행

2008년 3월 개성 관광을 추억하며

love123 2022. 4. 28. 20:56

개성관광은 2007년 12월 5일부터 2008년 11월 28일까지 시행된
대한민국 국민 대상 관광 프로그램이었다.
2000년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맺은 공업지구 건설에 대한
합의서와 2007년 백두산, 개성관광에 대한
합의서를 바탕으로 현대아산이 대한민국 통일부에
관광사업 승인을 받은 후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2005년 8월에는 3회에 걸쳐
개성 시범관광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실험으로 몇 년간 연기된 후
2007년 11월 3일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사이에 민간인 관광 허가서가 마침내 작성되었다.
경기도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출발하여
군사분계선을 지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도착한 후,
고려 오백 년 도읍인 개성의 문화유적인 박연폭포, 선죽교, 숭양서원,
고려박물관, 왕건왕릉, 공민왕릉 등을 관람하는 일정이었으며
개성 특산물로 구성된 11첩 반상기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해설원이 동행했다. <위키백과>

여행하면서 긴장감 속에 처음부터 돌아올 때까지 다닌 것 처음인 듯
새벽부터 나서서 교육을 받고
8시부터 30분 동안 모든 '출경' '입경' 수속을 마치고
남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며 비무장지대를 넘을 때
모두 경직된 듯 보였다
우리는 배정받은 버스에 세분의 북측 안내원이 올라타고 뿡뿡 출발

개성을 가는데 1시간 30분이면 충분했다.
가는 길에 북한 마을이 보이고
우리가 탄 버스를 멀리서 바라보는 주민들이
추운데 집도 우리 60년대 정도 보이는
몹시 추워 보입니다

개성에 도착하여 주변을 보니 집들이 꾸미지 않고
소박해 보이기는 하는데...

맨 처음 간 곳은 관음사
개성시 대흥산성 안 박연폭포 뒤쪽에 위치한 관음사는 고려 광종 21년인 970년에 법인국사 탄문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창건 이후 5차례의 중건이 있었으며 현재 모습은 정조 21년인 1797년 성훈 스님이 4번째 중창한 때 모습이다. 현재는 대웅전과 요사채, 1660년에 조성된 7층 석탑이 남아있다

어렸을 때 외가 마을이 생각납니다

박연폭포를 찾았는데
추워서 얼었습니다

개성시 북쪽 16㎞ 지점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웅장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 있다. 높이 37m, 너비 1.5m이며, 북한 천연기념물 제388호이다. 산성 폭포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3대 폭포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서경덕·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유명하다.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박연은 큰 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파여 생긴 것이며, 그 한가운데에 큰 섬바위가 솟아 있어 흘러내린 물이 이 바위에 부딪쳐 박연에 담겼다가 폭포로 떨어진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는 고모담이라는 큰 못이 있다. 고모담 동쪽 언덕에는 범사 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서쪽에는 용바위가 있다.
폭포 위에는 고려 때 축성한 대흥산성이 험준한 산봉우리들을 연결해주고 있다. 주변에 대흥사·관음사 약수·만경대 등의 유적들이 있다. <자료:다음 백과>

바위에 글을 새겨 놓은 곳이 많고요

선죽교는 김 잠곡(金潛谷)의 〈송도 굳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말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해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출처:다음 백과>

옛 이름은 선지교이다. 919년 고려 태조가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다. 고려말 정몽주가 철퇴를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 유명해졌다.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를 세워 보호했다. 선죽교의 석재 중에는 부근 묘각사에서 나온 다라니당 일부가 끼어 있다.
다리 동쪽에는 선죽교라 써진 비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1740년 영조의 어필인 포충 비와 1872년 고종의 어필의 표충비가 있다.
부근에는 1641년 목서흠이 건립한 음비와 1797년 조진관이 찬한 녹사 비, 1824년 이용수가 찬하고 신위가 쓴 녹사 비도 있다 <자료출처:다음 백과>

고려박물관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시에 건립된 박물관으로 개성시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성균관 건물과 그 주변지역을 기반으로 한 유적과 유물의 전시를 주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에 건립되었다. 전쟁 당시의 박물관 면적은 400㎡에 불과하였으나 박물관 개관 이후 박물관 주변에 있던 고려성균관 건물과 주변 지역의 유적지를 박물관에 포함시키면서 1,500㎡로 확대되었다.
고려박물관은 고려성균관의 건물이었던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존경각, 양실 등 18동 건물과 박물관, 야외전시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고려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개성지역에서 발견된 옛 유물과 유적들을 실내전시관과 야외전시구역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실내전시관은 4 개관으로 고려시대의 유물 1,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야외전시 구역에는 고려시대의 돌조각을 비롯한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서는 고려시대의 역사와 경제, 과학문화 발전상을 볼 수 있다. <자료출처:다음 백과>

북한 천연기념물 제386호. 은행나무는 성균관 마당에 두 그루가 서 있다. 성균관 마당에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387호인 느티나무가 있고 주변에는 썩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이 있다.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는 토양은 화강암 지대에 생긴 퇴적 모래흙이며 토심은 깊고 습기는 적당하다. 은행나무의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은행나무 두 그루 가운데서 서쪽에 있는 나무는 높이 31m, 뿌리목둘레 6.45m, 가슴높이 둘레 5.25m, 수관 지름 26m이다. 동쪽에 있는 나무는 높이 30m, 뿌리목둘레 6m, 가슴높이 둘레 5.25m, 수관 지름 20m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균관 은행나무(成均館銀杏─))

1573년(선조 6)에 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유림 세력과 협의,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선죽교 위쪽에 문 충당(文忠堂)을 창건하면서 비롯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숭양서원(崧陽書院))]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일 만큼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으며, 숙종·영조·고종이 개성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특히 견관 치제(遣官致祭)하는 은전을 받았고, 영조는 친필로 어필 사액(御筆賜額)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숭양서원(崧陽書院))]

식사시간
난방이 되지 않아 밥이 차가워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동선이나
장소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검색해 가면서
추억을 살려 보았습니다
산도 벌거숭이산 동네도 차갑고
보이는 시민들도 고생을 많이 한 얼굴들
가슴 아픈 기억이 되새겨집니다
남북이 얼어붙은 지 어언 몇 년이 지나
지금은 갈 수가 없지만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우리 팀이
가서 해 줄 일이 많은데요
더 시간이 가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하루 일정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