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상징 '천안문 광장' 자금성
세계 최대의 목조 궁전 자금성
자금성이란 이름은 1576년
처음 공식적으로 나왔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자금성의 자紫(보라색,
자주색)는 북극성을 의미하고,
자금성은 곧 우주와 같은 공간으로 생각되어,
하늘로부터 신성함을 부여받은 황제와 그의 가족의
영역이었다. <위키백과>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났던 사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1989년에 일어난 대학살
모택동 사진이 걸려 있는 천안문으로부터
광장 주변에는 중국 역사박물관부터
마오쩌둥 기념관, 평화의 문, 국기 등이 있다.
[출처: 베이징시 관광발전위원회]
사진: 구글 검색
자금성은 명나라 시대 북경 천도를 위해
건설되었다. 정난의 변을 통해 즉위한 영락제는
기존 수도인 남경(난징) 보다 자신의 세력 기반인
북경(베이징)이 수도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북경은 영락제가 즉위하기 전 그의 영지였던 곳으로
당시 명칭은 북평이었다.
영락제는 즉위한 뒤 북평의 이름을 북경으로 바꾸고
관련 기구를 설치하며 천도를 준비했다.
1406년 영락제는 북경에 자금성의 건설을 명령했다.
1410년 이후로는 건설에 쓸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운하를 정비하고 3천여 척 가량의 작은 배를 증설했다.
자금성 건설에는 수십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1420년 완공되었다.
1421년 영락제는 정식으로 명나라의
수도를 북경으로 정하였다.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쳐 600년 가까이
24명의 황제가 자금성에서 살았다.
<자료출처:다음 백과>
천안문 광장
오문
오문에는 총 5개의 문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중 약 3개의 문은 가운데 부분에 몰려 있고,
나머지 2개의 문은 양 옆의 날개 부분에 뚫려 있다.
맨 가운데 문은 오직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고,
유일한 예외는 결혼식 날의 황후만이 그날 한 번 가운데
문을 통하여 자금성을 출입할 수 있었고,
또는 과거시험에서 장원에 급제한 학자들만이 시험을 마치고
퇴궐할 때 이 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위키백과>
태화문
태화문은 태화전으로 통하는 전문으로,
명나라 때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봉천 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정제 때 황극 문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순치제 때 태화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위키백과>
태화전
태화전은 자금성의 정전으로,
높이 8.13m나 되는 3층 백색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졌고,
총높이는 35.05m이며 청동화로들이 그 주위에 세워져 있다.
본래 명나라 시대에는 봉천전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562년 가정제 때 황극 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면적 2,368제곱미터, 폭 66m를 자랑하며,
정면 11칸, 측면 5칸의 건물이며 자금성 내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이다.
또한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목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자료출처:위키백과>
보화전 내부의 금룡 보좌 전경
중화전은 황제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 용좌 위의 편액의 글은
황건 유극"황제가 먼저 그 다스리는 법을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중국의 역사서인 사서오경
서경에 나오는 말이다.
건 청문
내정의 정문
건청궁과 외조를 연결 짓는 문으로,
앞에는 보화전, 뒤에는 건청궁으로 통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1420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1655년에 다시 중수되었다. 동쪽에는 경운 문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융 종문이 자리하고 있다.
자금성의 상징으로 유명한,
금도금을 한 청동 사자상이 바로
이 건 청문의 양 옆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
보화전
보화전은 태화전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으나,
태화전보다는 약간 작은 크기로 높이 29.5m,
면적 1,240제곱미터이다.
황제가 이곳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거나
상소문을 읽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등 간단한 일상 업무들을 소화
보화전에서는 황제가 제야, 정월 보름 및 비정기적으로
대신들을 대상으로 성대한 연회를 벌였으며,
청나라건륭제 때부터 이곳에서 과거의 최종 시험을 치렀다.
건 청문
건 청문은 건청궁과 외조를 연결 짓는 문으로,
앞에는 보화전, 뒤에는 건청궁으로 통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1420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1655년에 다시 중수되었다.
동쪽에는 경운 문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융 종문이 자리하고 있다.
자금성의 상징으로 유명한,
금도금을 한 청동 사자상이 바로
이 건 청문의 양 옆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간청 문 (내정의 정문 )
교태전
교태전(자오타이뎬)은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에 있는 건물이다.
명나라 초기에는 황후가 거처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주로 황후의 생일에 축하의 예를 받는 장소였으며
시대에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출처:다음 백과>
어화원
자금성 안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소로,
황실 정원이었다.
지금도 오래된 수목과 기암괴석이 수려하다.
고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어화원은
내정의 뒤편, 최북단에 위치했다.
과거에는 외조 태화문부터 내정의
후삼 궁 주변까지 나무가 없었다.
이는 고대 건축 기법에 따라 궁전을
근엄하게 보이게 하고,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황제를 암살하려는 자가 침입해도
숨을 곳을 없게 한 것이다.
사실상 나무를 심는다 해도 자랄 수 없는 구조였다.
바닥에 벽돌을 깔았기 때문인데, 그 두께가 자그마치
벽돌 40장이 포개진 것과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자금성 곳곳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릉 입구
1992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2011년 중국 5A풍경구로 지정된
명 13 릉
정릉 신종과 황비
천수산 주변에 형성된 능묘군
명나라 13명의 황제, 23명의 황후,
2명의 태자, 30여 명의 후궁이 잠들어 있는 곳
만리 황후 소단 황후가 쓰던 봉황관. 1573-1620 명나라. <출처 : 위키백과>
황후 대례복
다산을 기원하고
발굴 당시 입구
관을 안치했던 곳으로
황제의 관(모조품)
명 3 릉 정릉 평면도
황제의 자리
만리장성
흉노족 등의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의 고대 진시황제 때
기존의 성곽을 잇고 부족한 부분은
새롭게 축조하여 만든 거대한 성곽이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개축 및 신축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위키백과>
이화원은 북경 서북부의 하이덴 구에
위치한 정원 공원이자 궁전이다.
주로 60m 높이의 만수산과 쿤밍호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다.
이화원의 면적은 2.9평방 킬로미터이고
이중에 3/4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쿤밍호는 2.2평방 킬로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다.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 데 사용되었다
7만 평방미터의 공간에 궁과 정원 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이화원으로 바뀌기 이전의 이름은 청의원이다
1750년 건륭제 재위 15년에 공사를 개시하였다.
솜씨 좋은 장인들은 정원 양식의 다양한 궁궐을 창조해 내었다.
쿤밍호는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수난을 당했고,
모조리 약탈당했다.
1900년에도 의화단의 운동 때도
8개국의 서양 열강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다행히도 완파되지는 않아서, 1886년과
1902년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1888년에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 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위키백과>
북경의 옛 거리
북경의 천단공원
중국 북경의 동서남북과 중앙에는 모두 다섯 개의 단이 있는데
하늘과 땅, 해, 달과 농사를 전해준 신농 등
다섯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경의 천단으로
건축과 경관 설계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천단은 제천의식, 즉 오곡 풍양을 위한 기우제와 풍년제 등을
올리기 위해 1420년 명대의 영락제가 건설한 제단이다.
낙뢰로 인해 소실된 것을 1896년에 재건했다.
황제의 상징인 용보다 황후의 상징인 봉황이
더 크게 조각된 것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서태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천단의 면적은 약 273만㎡로
황궁인 자금성의 네 배 크기로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제정한 문화유산 보호 제도 가운데
국가급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제정되는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선포됐다
2009년 벌써 13년 전 다녀온 것을
요즘 해외여행을 못하여 사진이 전 보다 많지 않아
정리를 하다 보니 그 시간을 기억해 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다녀오는 곳이 많이 있는데
사진을 보며 검색하여 오랜 된 여행부터
후기를 남기고자 합니다
2009 북경 여행은
두 분 선생님하고 함께 비즈니스 타고 다녀오고 ㅎㅎ
기분이 좋았는데
같이 가는 분의 지인이
롯데 백화점 면세점에서 구입하고
루비이통 백을 찾아 나에게 맡기고
나는 돌아오는 항공기 안에서
입국 심사 용지를 기입하려고
볼펜을 꺼내어 순간
백 중앙에 있는 곳에 볼펜이 살짝 그어져
어쩌나 ㅜㅜ
돌아와서 구입한 분께 말씀드리고
백화점에 가서 수리를 맡기고 몇 주가 지나서 수리비 18만 원을
내고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입하신 분이 받지 않겠다고 하여...
백이 둥둥 떠 있고 곤란해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행자에게 고가의 물품을
구입이나 맡기는 일은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그 가방은 동행하신 분께서 사주셨습니다
그런 기억이 나네요 ㅎㅎ
중국 여행은 여러 번 다녀왔지만
먹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고
중국은 너무나 많은 자원이 부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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